그 걸그룹의 로드매니저가 개발자가 되기까지
당신이 아는 그 그룹일 수도 있다
K-pop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아마 알 겁니다. 2022년에 데뷔해서 글로벌 차트를 석권한 대형 기획사 산하의 걸그룹. 데뷔 전부터 화제였고, 나온 뒤로는 멈추지 않았던 그 팀.
그 그룹의 로드매니저였던 사람이 지금 코드를 쓰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를 만든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려면, 꽤 먼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비선형 인생
2012학번, 토목공학과. 졸업 후 토목 설계 일을 시작했습니다. 도면을 그리고, 구조 계산을 하고, 현장을 다녔습니다. 안정적이었지만 뭔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기회가 생겨 K-pop 업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아이돌 매니지먼트라는 완전히 다른 세계. 스케줄 조율, 현장 관리, 아티스트 케어. 토목과는 180도 다른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잘 맞았습니다.
이후 CF 감독으로 또 한 번의 전환. 영상 기획부터 촬영, 후반 작업까지. 크리에이티브한 일이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가 모든 것을 멈췄습니다. 회사는 휴업에 들어갔고, 저는 다시 갈림길에 섰습니다.
그때 다시 K-pop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번에는 그 걸그룹의 로드매니저로. 데뷔 전 준비 기간부터 합류해서 2집 직전까지 함께했습니다. 새벽 공항, 해외 투어, 생방송 대기실. 화려해 보이는 무대 뒤에는 끊임없는 이동과 긴장,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일정이 있었습니다.
토목 → K-pop → CF → K-pop. 이력서에 적으면 면접관이 당황할 법한 경력입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매번 "지금 이게 아닌 것 같다"는 직감을 따랐을 뿐입니다.
전환점 — 코드를 잡다
사실 코딩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토목 설계를 하면서 자동화 스크립트를 만져본 적도 있고, "언젠가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습니다.
2022년, 로드매니저를 그만두고 유데미에서 웹 개발 강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HTML, CSS, JavaScript부터 차근차근. 비전공자의 독학은 느리지만, 코드가 화면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그 즉각적인 피드백이 좋았습니다.
2023년, 첫 개발자로 입사했습니다. 퀀트 회사. 코딩 독학 1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개발자 3사 — 퀀트, K-pop, 레이싱
퀀트 회사에서 개발자 첫발을 뗐습니다. 금융 데이터를 다루면서 실무 코딩의 무게를 처음 느꼈습니다. 학원이나 강의에서 배운 것과 실제 프로덕션 코드 사이의 간극은 상당했습니다.
두 번째 회사는 모드하우스. K-pop과 Web3를 결합한 곳입니다. K-pop 업계에 매니저가 아닌 개발자로서 다시 돌아온 겁니다. tripleS라는 그룹의 팬 참여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매니지먼트 경험이 있으니 "팬이 뭘 원하는지, 현장에서 뭐가 필요한지"를 피부로 알고 있었고, 그게 개발에 직접 반영됐습니다.
세 번째, 지금 회사는 쓰리세컨즈. 자동차 CAN 데이터와 레이싱 도메인. 또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차량에서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센서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일. 토목에서 구조 계산을 하던 체계적 사고가 여기서 다시 쓸모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비전공자의 벽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운영체제, 네트워크, 자료구조 같은 CS 기본기. 전공자들이 4년에 걸쳐 체화한 것들을 현장에서 부딪히며 익혀야 했습니다. 회의에서 모르는 용어가 나올 때마다 몰래 검색하던 그 감각. 비전공 개발자라면 아실 겁니다.
AI를 만나다
AI 코딩 도구들이 등장하면서 그 벽이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르는 개념을 물어보면 내 수준에 맞춰 설명해주고, 코드 리뷰도 해주고, 막히는 부분을 함께 풀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혼자 독학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습니다.
그리고 2025년 홀리데이 시즌, Claude Code를 처음 써봤습니다.
정말 미친 툴이었습니다.
단순한 코드 자동완성이 아니었습니다. 프로젝트 전체를 이해하고, 설계를 논의하고, 구현을 함께 해나가는 페어 프로그래머. 이전의 AI 도구들이 "더 나은 검색 엔진" 같았다면, Claude Code는 "함께 일하는 시니어 개발자"에 가까웠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블로그입니다. Next.js 15, TypeScript, Tailwind CSS v4, MDX.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었습니다. 물론 Claude Code와 함께. 디자인 시스템, 다크모드, i18n, RSS, 코드 하이라이팅까지. 2년 전의 저라면 몇 달은 걸렸을 작업을 며칠 만에 해냈습니다.
ccfg라는 Go TUI 프로젝트도 만들었습니다. Claude Code의 설정과 사용량을 시각화하는 도구인데, Go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동시에 프로덕션 수준의 도구를 만들어낸 경험이었습니다. AI 없이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돌아보면, 비선형 커리어가 오히려 무기가 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 매니지먼트 경험 → 프로젝트 관리와 소통 능력. 요구사항을 정리하고, 우선순위를 세우고, 사람들과 조율하는 일은 개발에서도 핵심입니다.
- 영상/CF 경험 → 디자인 감각과 UX 사고. "사용자가 이걸 보면 어떻게 느낄까"를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 토목 전공 → 체계적 사고와 구조적 접근. 큰 시스템을 작은 단위로 나누고, 각 부분의 역할을 정의하는 능력.
코딩 실력만 놓고 보면 전공자에 비해 부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AI가 그 간극을 메워주는 시대가 되면서, "코딩 외의 모든 것"이 차별점이 됩니다.
새로운 출발선에서
토목 도면을 그리던 손으로, 아이돌 스케줄표를 짜던 머리로, 카메라 앵글을 잡던 눈으로 — 지금 코드를 씁니다.
돌아보면 참 먼 길을 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느낌입니다. 개발자 경력 3년. 아직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더 이상 그게 두렵지 않다는 겁니다. 모르는 건 배우면 되고, 지금은 배움을 가속시켜줄 도구가 있으니까요.
이 블로그는 그 여정의 기록이 될 겁니다. 비선형 커리어를 걸어온 한 개발자가, AI와 함께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AI 시대, 당신의 경험이 무기다
코딩만이 개발자의 전부가 아닌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왔습니다.
AI가 코드 작성의 상당 부분을 도와주는 지금, 진짜 중요한 건 "무엇을 만들지"를 결정하는 능력입니다.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사용자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어떤 경험을 제공해야 하는지. 이건 다양한 삶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비전공자라서, 경력이 이상해서, 뒤늦게 시작해서 불안한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비선형 경험은 버그가 아니라 피처입니다.
토목 기사가 코드를 쓰고, 로드매니저가 블로그를 만들고, CF 감독이 UX를 설계합니다. AI는 이 모든 전환을 가속시켜주는 엔진입니다. 시작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이 가장 빠른 때입니다.